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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참 행복한 제자의 삶

조혜진 | 2016.06.12 13:24 | 조회 866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러분이 천 명의 사람을 만나면 천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만 명의 사람을 만나면 만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은 꼭 한 가지로 우리에게 답을 주신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답을 준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이야기 들어도 우리에게는 참고만 되지 영원한 위로가 되지 않고 조금 위로는 될 수 있지만 우리 마음에 답은 주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문제 저 문제 이 사건 저 사건 이런 저런 환경 속에서도 한 결 같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하신다. 오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것으로 답을 내시기를 축원한다. 그게 안 되어서 신앙생활에 실패한다. 똑같이 예배드린다. 그런데 이것으로 답을 낸 자는 복의 근원이 되어있다. 예배에 승리한다. 예배가 즐겁고 기쁘고 은혜가 된다. 이것으로 답이 안 되면 예배가 짜증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 교회 가도 그렇고, 저 교회 가도 그렇다. 임마누엘 서울 교회 가서도 불만이 생기고 또 다른 교회 가게 된다. 시편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앙생활 할 수 박에 없다.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답을 주기 원하신다. 거기서 답을 얻어야 한다. 교회는 복음 공동체이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기 때문에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이 오고, 치유 과정에 있는 사람이 오고, 아직 답을 못 내서 앉아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사람 보면 은혜 받지 못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시간되시기 바란다. 그게 아니면 늘 광야길 가는데 구원은 받았는데 두 종류가 나온다. 말씀 성취를 알고 오직 믿음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그마한 것만 보여도 시비 걸고 상처받고 조그마한 것에 걸려서 넘어지고. 육신적인 것만 자꾸 보인다. 바로 앞에 응답을 갖다 보여줘도 불구하고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메뚜기 같구나.”했다. 영적으로 보면 “저들의 신은 떠났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는 것이다. 복음 없이 세상 보면 얼마나 세상이 크고 불신자가 잘 사는 것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보면 저들이 마귀의 포로, 애굽의 종살이, 속국이 되어있다. 세상 사람들 이 말 저 말 하는 것을 듣고 서론에 설려 넘어지지 말고, 오직 본론 잡고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제대로 마라톤 하는 사람은 앞에 목표만 보고 달려간다. 사도바울도 “은혜 속에서 강하라. 너희는 영적 군사다. 경기하는 자다. 너희는 농부다.” 라고 말씀하는 걸 볼 수 있다. 신앙생활 하는데 오직 여호와만 앙망하시기 축원한다. 그 사람은 새 힘을 얻는다. 그렇지 않으면 새 힘 얻지 못한다. 그럴 때 이상하게 사단은 벌써 알기 때문에, 옆에서 시험 들 일을 누가 얘기해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을 못 보고 은혜 못 받게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짓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우는 것,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 기독교인이 청빈해야 된다는 것이냐?” 아니다. 기독교 국가만큼 부유한 나라가 없다. 예수 잘 믿는 나라가 가난한 나라가 없다. 물질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했다. 물질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크리스천이다. 우리 주님이 물질이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떡으로도 살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에 말씀을 들어야 한다. 떡이 아무리 많아도 불신자는 그것으로 걱정한다.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인 것이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 말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한다. “지식이 더하면 근심이 더한다.” 했다. 아는 것도 제대로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지식이 더하면 근심이 더한다고 하셨는데,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몰라서 망하는 것이다. 호6:4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했다. 잠1:7에 보면“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했다. 근본 지식을 놔두고 다른 것을 아니까 바벨탑 인생이 되어 실컷 쌓고 무너진다. 쌓아놓고 행복이 없는 것이 불신자다. 인생 전체 마지막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므로 육신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그래서 어느 날 우울증 조울증이 오고 정신병원에 가야한다. 늘 메시지 받기 전에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고백하는데 근본문제 해결된 줄 믿으시기 바란다. 아직 근본문제가 해결 안 된 것은 아직 오직이 안 되어서 그렇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힘이라 한다. 모든 것이다. 그것이 능력의 삶이다.

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까? 한국이 세계적으로 치안이 가장 잘되었다고 하는데, 보면 저 사람이 행복이 없구나 싶다. 판사가 되도, 변호사가 되고 장관이 되어도. 등산가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 보면 ‘사람들이 정말 행복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데 있어서 그렇다. 행복 주지 못하는 것을 행복인 줄 알고 붙들기 때문이다. 행복의 기준이 아닌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행복의 기준을 바꾸어라’ 한다. 돈 ,지위, 건강, 명예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을 붙들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복은 신령한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시편 기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환경 어려움 역경이 다 많았으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역경을 이기는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시편 1편은 전 시편의 서론이다. 전 시편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두 가지를 말한다. 복 있는 자와 복 없는 자.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사람이다.’ 복 없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가? 첫째는 ‘신령한 것이 우선’이다. 사람은 육신의 떡만 갖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 참 된 행복은 심령가운데 기쁨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행복 아닌 것에 생을 건다. 거기에 초점 맞추고 기준을 두니까 가지고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 시편에서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 하는 복은 필연적인 결과로 주어진다. 그래서 당연성, 필연성, 절대성을 말한다. 우연한 기복이 아니라, 잔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범사가 형통한 것이다. 범사에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이 형통이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이 지금 내게 임재 해 계시는 즐거움에서 그것을 형통이라고 한다. 내 재주와 노력과 꾀를 가지고 조금 유익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평강과 바탕위에 그 즐거움 속에 하나님의 손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형통이다. 노예로 가도 하나님 주시는 형통이 있고, 감옥에 가도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있고, 장관이 잊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 있다. 거기에 참 평안이 있다. 내가 그것을 가져야 한다. 복의 본질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그것이 6절의 결론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분은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그것이 구별이요, 임마누엘이요, 성전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된 것을 극히 죄라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려라. 생명 과실 먹고 영생 하라.” 했는데 영생 관계를 놓쳤다. 하나님 떠나니 사단 마귀가 잡고 있다. “무슨 사단 마귀인가?”하는 분이 있는데 현장 가보라. 굿하고 점하는 분 보면 거기 마귀 귀신 있다. 이 세상 풍습을 좇는다. 그것이 사단 마귀가 인생을 종 삼기 위해 만든 것이다. 궁합, 터, 방향 맞춰 이사 가는 것은 하나님 떠난 인간이 거기에 종살이 하는 것이고 사단 마귀가 만든 풍습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예수 알면 끝이다. 거기서 해방되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궁합, 사주팔자, 방향이 필요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말씀을 비웃고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죄의 부패성이다. 하나님께 능동적으로 의식적으로 반항 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다. 죄의 점진성. 죄는 자란다. 한번 허용하면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급속도로 퍼져 부패한다. 그런데 반대로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자꾸 듣고 싶다. 그것이 생명의 역사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 말씀대로 들으면 얼마나 기쁜지 자꾸 듣고 싶다. 복음의 능력인줄 믿으시기 바란다. 그런데 죄의 부패성은 한 번 들어오면 쾌락과 점진성이 있어 늘 그리로 끌려간다. 그래서 우리 육체가 만신창이 될 만큼이다.

시편은 그래서 두 가지 인생을 말한다. ‘복 있는 자 인가, 복 없는 자 인가.’ 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명인가 죽음인가, 좁은 길 넓은 길, 언약 있는 예배인가 종교 예배인가, 가인인가 아벨인가’ 구분한다. 믿음이 절대 복잡하지 않다. 믿음은 어린아이도 듣고 천국가게 하는 것이다. 병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믿고 구원 얻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 주님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 믿는 데에는 단순하고 순전해야 한다. 복음 앞에 구원의 길 앞에 다른 모든 것을 전부 내려놓기를 축원한다. 구원 받는데 뭐 다른 것이 필요한가? 복음 들을 때는 어린아이 같이, 교회 와서는 계산적인 것과 인간관계 다 내려놓으시고 은혜 받기 바란다. 내가 살면 그 분들을 살린다. 교회는 내가 잘하는 것과 내 의가 필요 없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교회에는 내가 잘났다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시편 1편에는 두 가지 인생이 있다. 복 있는 자와 복이 없는 자다. 시편 전체는 복 있는 자가 고백하는 것이다. 어려울 때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살아계심 체험하고 고백한다. 어려울 때 시편 1에 모든 답이 다 나온다.

첫 째. 성도의 시작은 복 있는 자로 시작한다.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이 상황 저 상황을 생각하지 말라. 성도의 시작은 복 있는 자로 시작한다. 내가 복 있는 자로 믿어져야 하고, 내가 복 있는 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나는 불행하다. 안 그러면 사단이 틈탄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믿어지면 이것보다 쉬운 게 없다. 믿어지면 이것보다 감사한 게 없다. ‘나에게 복이 있다니’하면서 믿어지지 않으면 이것보다 어려운 게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라.’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셨다. ‘빛이 되라.’ 하시지 않고 ‘빛이다.’ 하셨다. 빛에는 어둠이 없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어둠이 없어져야 당연하다. 그런데, 내가 어둠을 생각한다. 왜 그런가. 체질이다.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 믿은 사람이 있다. 정말로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는데, 어느 날 귀신이 또 나타난다. 체질적으로 그렇게 되어있다. 속지 않기를 축원한다. 성도의 시작은 복 있는 자로 시작이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이다. 원문은 ‘축복받는 자다.’라는 것이다 축복받는 자는 불신자처럼 살지 않는다. 축복받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세상 말을 새기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 24시 하나님의 말씀이 각인되어지고 누려지는 것이다. 시편의 기자가 ‘복을 받으려거든 죄의 길을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서지 마라.’ 하는가. 아니다. 복 있는 자는 그 것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따라하라. ‘나는 복 있는 자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소금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출발시키신다. 복 없는 자들이 복 받으려고 쫓아다니는데, 그게 불신자다. 그러니 불쌍하다. 복 없는데 돈을 가지니 복 없는 짓을 한다. 복 없는 사람이 건강을 가지니 저주 받을 짓을 한다. 그러니 행복이 없다. 반대로 행복해야 할 사람이 그것을 발견 못해서 고생하는 것이 잘못 예수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 교회 와서 엉뚱한 짓을 하고 싸운다. 왜냐하면 복 있는데 복이 없다고 생각하니 사단의 노리개가 된다. 오늘도 시편 1편은 우리의 시작이다. 우리는 복 있는 자로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시작이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태가, 시냇가의 심겨진 나무의 상태다. 뿌리를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벌써 심겨져 있다. 더 깊이 내려 강줄기에 생명의 공급을 받으라는 것이다. 시냇가가, 복음의 흐름이다. 생명의 강줄기이다. 그래서 각인, 뿌리, 체질이라는 말이 시편1편을 보면서 이해되시고 누려지기를 축원한다. 복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복이 있으니 시냇가의 나무처럼 철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신다. 이런 일, 저런 일을 가지고 휘둘리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정금보다 더 귀하게 연단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복 없는 사람은 어떤가. 불신자의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복 있는 사람은 ‘앞으로 넘어졌는데 수박을 안고 일어난다.’한다. 수박 밭에 넘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으시길 바란다. 나에 대한 복음적 해석이 안 되니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 옆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아 그렇다. 진짜 내가 예수 믿으면 남편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 진짜 복음 받아 행복하다? 옆에 있는 중직자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 우리가 결과를 바꿀 수 있는가. 못 바꾼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못 바꾼다. 예수 믿는 자는 생명을 얻었다. 절대 망할 수가 없다. 어떤 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망하던데요 ?’한다. 안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다. 복음을 모르고 교회를 다닌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느 날, 하나님이 구원하실 줄 믿으시길 바란다. 하나님이 정확한 시간표 속에서 완전 망하게 해서 다시는 그 짓을 안 하도록 작업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이렇다.” 하지 말고, 그 주권 속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답이 나온다. 순종도 안 하고 믿지도 않으면 “하나님 없네.” 한다. 귀신이 없다 해서 난리 난 분이 여기에 있다. 영적사실을 모르고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데 귀신이 떼거리로 와서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치유하셔서 이제는 그분이 ‘아 귀신이 있네.’ 한다. 마귀, 귀신, 천사, 지옥, 영혼이 있다. 성도의 시작,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의 시작은, 성령께서 인 쳐 보증하셨다. 그러면 그것을 취소시킬 수 있는가. 없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보증이 되셨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다.

둘 째.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아니다. 우리 목표가 뭔가. 시1편은 우리의 시작이다. 시150편,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제일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뭔가. [시 150:1-2]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이게 성도의 목표이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여러분의 입술에서 원망, 불평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원망, 불평이 나오면 벌써 속고 있는 것이다. 받을 응답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져다주신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고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다? 우리의 목표가 뭔가. 나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그게 궁극적 목표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백성이 어디로 가는가. 푸른 나무 밑에 우상산당으로 가서 제사하고 돌 깎아놓고 절하고, 나무에 절하고 비 오게 해서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 한다. 육신적인 것에 매였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최고의 삶,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것이다. 시편에 모든 기자들은, 잘될 때도 찬양을 했다. 안될 때도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고백이 흔들리지 않았다. 시1편, 2편은 너무나도 힘든 상황인데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기도, 찬송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시1,2편은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그 고백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찬양과 영광을 돌렸다. 그게 복음의 사람이다. 우리 영혼의 입술에서 찬양이 계속 나와야 한다. 감사가 나와야 한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 앞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러니까 영혼으로 찬양을 드린다.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래도 잘 불러야 한다. 저는 어릴 때부터 유행가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들리는 걸 어떻게 하는가. ‘권’ 무슨 가수인데, 산장의 여인을 불렀다. 그런데 산장의 여인을 부른 사람이 진짜 폐병이 걸려 산장으로 갔다. 저희가 클 때, 인기 있는 가수가 있었는데 ‘페티김’이다. 한번은 TV에 나와 아나운서가 물었다. “이별의 노래가 히트 쳤는데, 진짜 이별할 줄 알고 불렀는가.” 했다. “그 노래가 1년 전에 히트 쳤는데, 그때는 이별하고 이혼할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한다. 그분이 노래를 영혼으로 부른 것 같다. 그 노래를 부르고 이혼했다. 요즘도 조 아무개 가수가 일을 많이 벌이는데, 제가 좋아한 가수이다. 그 분이 부른 노래 중에 ‘제비’라는 노래가 있다. 보면 진짜 심금을 울리는 노래지만 또 이혼을 하고 한다. 그 분이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나왔다. 공식적으로는 목사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은 화투를 그린다. 화투 같고 도박 같은 인생을 산다. 그분은 엘리트이다. 서울대와 트리니티 신학대학교를 나오고 가수이기도 한데 영적상태는 ‘너무 불쌍하다.’하는 상태가 되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를 부른 사람이 있는데, 진짜 낙엽 따라 가 버렸다. 성도는 신앙고백을 잘해야 한다. 노래를 잘 불러야 한다. 찬양을 많이 부르시길 바란다. 왜 마음에 허무가 들어오는가. 찬양이 넘치지 않고 세상 것이 넘치기 때문에 사단의 통로가 된다. 자고 눈을 뜨면 누구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이다. 제가 이 사실을 알고, 행복 24의 기도를 알고 눈을 뜨면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내 모든 문제 해결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부터 시작한다. 그다음에 ‘오늘 하루도 주님이 주인 되셔야 합니다. 오늘도 내 마음과 영혼, 삶속에 주님이 주인 되어 주옵소서.’한다. 내가 주인이 되면 공격당한다. 내가 주인이 되면 실수한다. 그다음에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된다 하셨으니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충만, 마가다락방에 주신 성령께서 오늘도 내게 충만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한다. 눈뜨면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이 주인되시고,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시작하시길 축원한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앞에 영광이다. 입만 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의 찬양이 시편이다.

셋 째. 성도의 삶의 과정은 인도받는 삶이다.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시작은 복의 근원인데 과정은 어떤 것인가. 과정은 인도받아야 한다. 시23편이다. 시1편, 시23편, 시150편은 암송하셔야 한다. 그 것을 잘한 사람이 다윗이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신데, 목자를 따라가는 게 행복이다.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한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따라가야 행복하지, 따라가지 않는데 어떻게 행복한가. 주님이 목자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신다. 그 곳이 쉴 곳이고 영혼에 안식과 양식이 있다. 그 곳에 주인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배경이라 다윗은 고백한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늘 두 가지의 삶 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허무하고 헤매고 종살이 하는 삶인가. 두 가지의 삶뿐이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말씀을 따라가면 막대기에 맞을 일이 없다. 하나님의 인도에는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표가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정확한 시간표로, ‘어떻게 이렇게 맞춰놨는가.’하게 된다. 그게 다윗이고 요셉이다. 요셉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표로 30세에 총리가 된다.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한다. 아무리 꿈 해석을 잘 해도 15세에는 총리가 될 수 없다. 30세가 안되면 공직에 나갈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정확한 시간표로 따라가게 하신다. 렘넌트들, 걱정 말기를 바란다. 복음 안에서 기다리면 정확한 시간표를 가지고 계신다. 삶의 방법이 뭔가. 인도받는 것이다.

결 론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할 때에 기적이 일어난다. 암송 안 되면 ‘그 지금, 목사님 무슨 설교했더라?’ 하고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암송되면,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의 목자였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네. 정확한 시간표로 인도하시네.’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암송되기를 축원한다. 암송이 안 되면 갖다놔도 보이지 않는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있다. 암송해야 한다. 시편 1편이 암송되어야 한다. 내가 정말로 시낸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가 맺게 된다. 하나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한다. [시 1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이 말씀이 암송 될 때 기적이 일어난다. ‘영혼이 소생한다.’ 기적이다. ‘눈이 밝아지는 것’ 기적이다. ‘우둔한 자가 지혜로워 지는 것’ 기적이다. 사람이 우둔한 것은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 말씀 깨달으면 어느 날 지혜로워진다. 마음으로 암송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머리 말고 가슴으로 내려올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시 119: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을 삶 속에 두면 실족하지 않는다. 말씀이 삶 속에 없어 실족한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영안이 어두워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보이는데 왜 실패하는가? 안보여서 그런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빛이니이다’ 했다. 주의 말씀이 오늘도 내게 적용되어 행복한 인생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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